세월이 참 빠르구나. 이렇게 금방 1년이 지나가다니. 2년간 군에 있을 때, 휴가 나올 때마다 맨 처음에 하는 일이 뉴스에서는 나오지 않는 바깥 세상의 소식을 접하기 위해 서점과 PC방으로 달려가는 일이었는데, 마치 답답한 골방 속에 몇달 동안 갇혀 있다가 눈부신 햇살을 쪼이고 신선한 바깥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과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제 매일같이 인터넷도 자유롭게 쓸 수 있고, 서점에서 책도 자유롭게 볼 수 있고, 배우고 싶었던 것(너무 많아서 문제!!)에도 푹 빠져들수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악조건1 : 모든 면에서 업그레이드가 필요한데 돈은 없었다
그러나 현실의 벽을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컴퓨터도 8년 전에 조립한 AMD K6-2 400MHz 그대로였다. 2004년까지는(사실 그당시로도 엄청난 저사양이었다)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지금까지 늘 쓰던 컴퓨터라 느린 속도에 적응된 상태였고 최적화를 통해서 나름 잘 써 왔다. 그러나 휴가때 집에서 인터넷이 안되어 매번 PC방에서 인터넷을 했는데, PC방 컴퓨터의 빠른 속도와 윈도우XP에 적응된 나로써는 Legacy PC, Legacy OS는 도저히 답답해서 못 쓸 정도였다. 100Mbps 인터넷 선을 달았는데 컴퓨터 성능이 너무 딸려서 인터넷 속도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업그레이드가 당장 필요한 상황이었는데 컴퓨터 가격이 아무리 싸졌다 해도 돈이 없으니 그저 그림의 떡이었다.
마땅히 입을 만한 옷도 없었다. 아니 '입을 만한'이라기보다 '입을 수 있는' 옷이 거의 없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군대 가기 전에도 가진 옷이 별로 없었지만, 그나마도 낡고 유행이 지난 옷이 되어 버렸다. 옷을 사긴 사야 하는데, 돈이 없으니 우선순위에서 계속 밀릴 수밖에 없었다. 어이없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옷 구경하러 나서는 것조차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악조건2 : 고질적인 집안/개인 문제와 처한 상황이 나를 옭아매다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 것도 문제였다. 길게 호흡하고 당장에 모든것을 다 하기보다 체계적으로 장기 계획을 세웠어야 했는데 그러하지 못했다. 그리고 내게는 집이란 곳이, 편히 몸을 쉬거나 안정적으로 무언가에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이 '여전히' 아니었다. 뻔히 예상가능한 것이었지만 집안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내게 집이란 편히 쉬기 위해 혹은 작업이나 공부에 집중하기 위해서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마땅히 다른 데 갈 데가 없어 '어쩔 수 없이' 들어가는 곳이었다.
(학교에서의) 협소한 인간관계 역시 은근히 압박으로 작용하였다. 그리고 군 복무 기간은 2년이었지만, 한 4년은 늙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사실 군대가기 전에 나는 '나이'라는 것을 거의 의식하기 않고 살았다. 누가 나이를 물어봐도 나는 거의 '79년생'이라고 대답했으며, 나이를 계산하더라도 만 나이로 '계산'해서 대답하곤 했다. 그러나 군대에서는 모두들 한국 나이 기준으로 나이를 묻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나는 생일이 12월이라서 일 년 중 대부분의 기간동안 한국나이가 만나이보다 2살 많다. 입대 직전에 나는 (만으로) 25살이었지만, (한국나이로) 29살에 전역한 것이다.
아직 졸업을 한 것도 아니었다. 정규학기 앞뒤로 계절학기를 붙여서, 한 학기 동안에 28학점을 이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계절 학기가 6월 중순에 시작되었으니, 전역 이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은 사실 두 달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힘들고 불안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일은 손에 잡히지 않고 돈은 없고 과외는 금방 안구해지고....
악조건3 : 변화한 대학은 숨막히는 '또 다른 감옥'이었다
최소 한학기동안은 더 학교에 다녀야 할 나를 맞이한 대학은 예전의 그곳이 아니었다. 전역하고 나서 처음 학교를 갔을 때, 중앙도서관 터널의 그 많던 '자보'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는 사실은 사태의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처음 그 모습을 보았을 때, '올 것이 왔구나' 하면서 애써 덤덤하려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느꼈던 상실감은 피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자보로 뒤덮혔던 넓은 한쪽 벽면은 금속 판넬을 덮어 전시장으로 꾸며져 있었다. 이제 그곳은 '사전에 허가를 받은' 단체의 '작품'들만 '전시'할 수 있는 '깨끗한' 공간이 되어버렸다.
자보는 그야말로, 총학생회 게시판이라고 명명된 몇개의 나무로 된 게시판에서만 볼 수 있었다. 마치 거의 멸종되다시피 한 인디안을 '인디안 보호 구역'이라는 데서만 볼 수 있듯이 말이다. '학생운동'이라는 것은 '역사'가 되어버렸다. 대학이라는 곳 또한, 고등학교랑 별 차이 없는, 다만 고등학교때보다는 더 많은 자유가 주어진, 공부하는 곳, 정확히 말하면 '점수'를 받기 위해 공부하는 곳이 되어버렸다. 졸업할 때까지 공부 이외에는 해 본 게 없는 사람들이 진짜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명실상부한 '88만원 세대'의 시작이다. 비록 한학기 동안이었지만 경계인으로서 '그들'과 같이 생활해야 한다는 건 정말 괴로운 일이었다.
87년 6월 항쟁이 일어난지 딱 20주년이 된 2007년 6월, 관악에서는 어떤 기념 행사나 6월 항쟁의 현재적 의미를 찾고자 하는 움직임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87년 체제의 종언이다. 그러나 87년 체제가 '신자유주의'와 '보수화', '자본화'로 귀결되었다는 것은 상당한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작년 10월달이었던가? 11월이었던가? 여러 대학교 학보사들이 연합해서 대학내 여론조사를 했는데, 자신이 '보수'라고 생각한다고 답한 이들의 비율이 40퍼센트 대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러한 변화는 실은 최근 몇년동안 급속도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곳은 내가 전에 몸담았던 대학이 아니라 전혀 낯선 다른 곳이라는 생각에 하루에도 몇 번씩 가슴이 답답해졌다.
악조건4 : 민주노동당의 몰락
돌이켜보면 2004년은 희망에 들뜬 나날들이었다. 바로 민주노동당이 원내에 진출한 해였기 때문인데 한두 석도 아니고 무려 10석이나 차지해서 원내교섭단체까지 구성하였다. 진보의 잠재적인 힘이 드디어 현실화된 것이다. 얼마나 꿈에 그리던 원내진출이었던가. 그러나 사실 원내진출 그 자체도 중요한 것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원내진출 이후에 어떻게 하느냐였다.
그동안 민주노동당이 내건 주요 슬로건은 '무상의료', '무상교육', '부유세' 등 유럽의 사민주의적 복지정책이었다. 그것들은 2002년 이후로 줄곧 대중들한테 상당한 지지를 얻어 왔다. 2004년에 대중들은 민주노동당에게 제도권 내에서 그것들을 추진해 보라는 기회를 준 셈이다. 만약 민주노동당이 대중들의 뜻을 제대로 알아차리고 부유세 등의 도입에 총력을 기울였다면, 그리고 당내의 정파문제 등 몇 가지 고질적인 문제들을 심각하게 여기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모색했다면 우리들에게 2004년은 '민주노동당 제2의 도약의 해'로 기억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 민주노동당은 대중들의 기대를 져버렸다.
그 결과, 대중의 지지율뿐만 아니라, 당원들의 열정 또한 해가 갈수록 시들해지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그럼에도 2007년 초반에는 '권-노-심' 간의 대선후보 경선으로 인해 모처럼 당에 생기가 돌았다. 어쩌면 초반에 자주돌이들이 특정 후보를 조직적으로 밀어주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처음에는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중반 이후로 자주파와 다함께는 권영길 후보를 조직적으로 밀기 시작했고 어이없게도 권영길 후보측은 그들과 결탁했다.
결국 대선후보는 '도로 권영길'로 결정되었는데, 사실 껍데기만 권영길의 것이었고 실제로 발언과 행동의 내용을 조종하는 것은 '자주파'였다. '코리아연방공화국'이니 '100만 민중대회'니 하는, 2002년 대선때보다도 더 퇴보한 정책(그런데 이런 걸 정책이라고 부르나요??)을 이야기했으니,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거기에 더하여, 당권을 장악한 자주파들이 당내에서 벌이는 온갖 패권적 행태와 종북적 행태들을 보면 이 사람들은 동지가 아니라 타도해야 할 적으로 보였다. 그동안 '나의 당'이라고 생각했던 민주노동당이 점차 망가져 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그야말로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글이 너무 길어져서 2편은 다음번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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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한과 아주 도움이 되는!
2008/05/23 04:31친구는 너의 현재 위치의 팬이 되었다!
2008/05/23 05:09정보를 위한 감사합니다.
2008/05/23 06:56